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1352년~1359년, 공민왕의 즉위와 왜구의 공세 === 이런 상황에서 충정왕이 물러나고 고려 최후의 명군이라 불리는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했다. 그러나 '''공민왕 즉위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현재의 경상남도 [[남해군]]인 남해현(南海縣)이 왜구의 공격을 받았다. 이듬해인 1352년, 공민왕은 자신의 [[개혁]] 의지를 담은 유지(宥旨)를 전국으로 반포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한 경고도 있다. 이 무렵에는 왜구가 국가에 심대한 타격을 미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무슨 덕이 있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느냐마는, 현재 국가의 상황은 쇠퇴의 길을 밟고 있고 풍속은 타락했으며 조정에는 부적절한 인사가 횡행하고 나라 재정은 고갈 상태이다. 또한 이웃의 왜적들이 우리 강토를 침구하고 하늘에 재변이 나타나고 있으니, 이제 내가 스스로를 가다듬고 정신을 쏟아 하루도 빠짐없이 근신하여 사악한 자들과 간특한 소인배들을 제거하는 한편 백성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관후한 정치를 행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천자의 덕에 보답하며 선조가 남긴 왕업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모친의 마음을 위로하고 국가원로들의 기대에 부응하겠는가? >---- >'''《[[고려사]]》 공민왕 2년 2월 병자일 1352년''' || [[파일:gonminwang2.jpg|width=170]][br]'''[[공민왕]](恭愍王)''' || 헌데 이런 경고도 무색하게 다음 달인 3월, 또다시 왜구의 공격이 닥쳐왔다. 이 왜구들은 경기도 주변을 노리고 있었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포왜사(捕倭使) 김휘남(金暉南)은 25척의 함선을 이끌고 나섰으나, 왜구가 20여척의 함선을 가지고 있자 '''싸우지도 않고 [[교동도|교동]](喬桐), 현재의 인천으로 달아났다.''' 그 동안 왜구들은 [[강화도]]로 몰려와 그 지역을 도륙했다. 왜구들이 게속해서 증원되었는지, 김휘남은 중과부적을 느끼고 서강(西江)으로 물러서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도성에서 지원병을 보내 수비하게 하자 수도 [[개경]]의 사람들은 왜구의 침입이 여기까지 닥친것을 알고 대단히 놀랐다고 한다. 이 왜구들은 교동(喬桐) 갑산창(甲山倉)에서 최원(崔原)이 격전을 치르고 2척을 나포하자, 이 지역을 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는지 물러난 듯 보인다. 이후 몇달간은 소규모의 침입만 있었는지 전라도 등지에서 몇몇 포로를 잡았다는 기록이 다지만, 그해 9월에는 다시 합포에 50여척의 왜선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여담으로 [[네이버]]에서 지원하는 《[[고려사]]》에서는 당시의 기록에 대해 '''540여척'''이라는 충격적인 언급이 나오는데, 원문이 50여척인것을 보아서는 국역하여 옮겨적는 와중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40여척이면 고려 말 침공해온 왜구들 가운데 역사상 최대 규모 수준이다.] 그 다음해인 1353년은 정말로 드물게 왜구의 침공이 없었던 해였다. 이때의 왜구에 대한 기록은 경상도 지역에서 8명 ~ 10명에 이르는 소규모의 왜구를 포로로 잡았다는 보고만 올라왔을 뿐이니, 설사 침략이 있었다고 해도 대단한 수준은 못 되는 해였다. 허나 이런 평화로운 시기는 그렇게 길지 못했다. 1354년 4월, 왜구는 전라도의 조운선 40여척을 노략질 했다. 허나 이런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볼 수 없는데, 고려 장수들의 전공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승전했다는 기록은 없고 그저 몇몇 포로를 바쳤다는 식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상황은 계속 심해져서, 다음 해 1355년 4월에 이르면 왜구는 '''전라도의 조운선 2백여척을 약탈하는 수준에 이른다.''' 조운선이 2백여척이나 약탈 당할 정도면 사실상 조운을 이용한 세미 확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 그 다음 해인 1356년은 드물게도 왜구의 침입이 전혀 없었던 해였다. 지방에서 왜구 포로를 잡았다는 보고조차 없었던 것을 보면 소규모 교전조차 없었던듯. ~~그게 아니면 당하고도 보고를 안 했거나.~~ 물론 다음 해인 1357년 5월 왜구는 다시 나타나 교동(喬桐)을 공격했으며, 이 때문에 수도 개경은 다시 경계령이 내렸다. 그런데 8월경, 왜구는 승천부(昇天府)[* 지금의 개성 직할시 개풍군]에 침입해 사찰인 흥천사(興天寺)를 공격했고, '''충선왕(忠宣王)과 한국공주(韓國公主)의 영정을 탈취해 갔다.''' 왕조의 선왕들을 모신 영정마저 왜구에게 탈취당하는 막장스러운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9월 상장군 이운목(李云牧), 장군 이뭉쿠다이(李蒙古大)를 파견하여 왜구를 추격하게 했는데, '''왜구가 교동까지 쳐들어오자 정작 이운목 등은 겁을 먹고 도망쳐서''' 이들을 감옥에 가두는 사태도 발생했다. 1358년에는 왜구의 침공이 더욱 거세졌다. 이 해 3월 왜구는 각산수(角山戍)[*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에 침입하여 '''선박 3백여척을 불태웠다.''' 이 무렵 정주부사(定州副使) 주영세(朱永世)라는 인물과 전라도 만호 강중상(姜仲祥)이라는 인물이 왕의 허락도 없이 임지를 불쑥 떠나 공민왕을 알현하겠다고 찾아왔는데, 계속되는 왜구의 침공으로 [[스트레스]]가 막심했던 공민왕은 격노하여 '''"왜 부른 적도 없는데 근무지 이탈하고 오냐!"'''라며 그들을 감옥에 쳐넣기까지 한다. 참을 만큼 참은 공민왕은 4월 합포진변사(合浦鎭邊使) 유인우(柳仁雨)가 왜구를 막지 못하자 감옥에 쳐넣는 한편, 대장군 [[최영]](崔瑩)을 양광도와 전라도의 체복사[* 일종의 중앙에서 내려보낸 감찰관이다.]로 삼아 왜구를 막지 못하는 자들을 군법으로 처단하도록 하는 강경한 대책을 내세웠다. 또한 왜구가 [[충청남도]] 지역의 창고를 계속해서 노략질하자 전라도 진변사(全羅道鎭邊使) 고용현(高用賢)의 대책을 받아들여 바닷가의 창고를 내지로 옮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공은 끝이 없었다. 5월 왜구는 면주(沔州)[*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이다.]를 공격하고, 현재의 경기도 [[평택]]인 용성(龍城)을 공격했다. 왜구의 교동 침공 역시 '''또''' 이어져서 '''개경은 또''' 비상 준비 태세를 갖추고 추가적으로 병력을 징발해야 했다. 심지어 당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왜구의 침공이 너무나 극심해서 요새 관리들에게 녹봉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국가가 백성은 구휼하지 못하더라도 중앙의 관리들은 먹이는 게 보통일텐데, 그것마저 원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구가 심심하면 강화도와 인천 주변에 나타날 정도로 서해안이 완전히 왜구에게 장악되어 있으니 조운으로 세미를 걷을 방도가 없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중국인 장인보(張仁甫) 등을 책임자로 하여 150여명의 호위 병력을 붙여 전라도에서 세미를 걷게 했는데, '''호송 병력이 있음에도 왜구가 불화살을 날리며 공격하자 모조리 패배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8월 경에는 수원과 인천이 계속해서 왜구에게 공격을 당했다. 다음 해인 1359년 역시 왜구의 침공은 여전했다. 왜구는 [[해남군|해남]]과 [[장흥군|장흥]]을 유린했고, 5월에는 [[예성강]](禮成江)에도 나타났다. 결국 공민왕은 '''왜구의 침입을 막게 해달라고 태묘(太廟)에서 기도까지 올렸는데,''' 전혀 소득도 없이 며칠 뒤에 왜구는 옹진현(瓮津縣)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옹진현은 '''[[황해남도]] 옹진군이다.''' 한반도의 북방 역시 왜구의 장난감이 된 것이다. 그러던 와중 현재의 [[전라남도]] [[무안군|무안]]에서 전라도 추포부사(追捕副使) 김횡(金鋐)이 왜구를 상대로 소규모 승리를 거두는 일이 있기는 했으나,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